2020. 9. 17. 19:56ㆍRay 수학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수학을 배우게 된다면
3학년때 쯤 내가 결국 미적분을 배우려고
지금까지 수학을 배웠구나란 생각이든다.
많은 사람들이 수학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미적분
그리고 미적분의 역사에 대해 몇 개에 영상에 걸쳐 알아보도록 하겠다.
1696 스위스 바젤
요한 베르누이는 6개월의 마감기한을 주고
뛰어난 수학자들에게 문제를 내서 편지를 보냈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등 유럽에 내노라 하는 수학자들에게 편지가 배달되었다.
문제는 높이가 다른 두 점을 잇는 최단 강하선을 묻는 문제였다.
첫번째 정답자는 라이프니츠였다.
그리고 6개월간 4명의 정답자가 더 나왔다.
하지만 베르누이는 기다렸던 사람에게 답장이 오지 않자 기한을 연장했다.
바다 건너 문제를 받게 된 영국의 수학자는
단 몇 시간만에 문제를 풀고 이름도 없이 답장을 보냈다.
늦었지만 그 편지엔 정확하고 간결한 답이 적혀있었고
이름은 없었지만 베르누이는 그 편지의 발신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작 뉴턴이었다.
베르누이가 낸 문제는 사이클로이드를 묻는 것이다.
자전거 바퀴가 갈 때 바퀴 위의 한 점은 일정한 곡선을 지나고
이 곡선을 사이클로이드라고 한다.
실제 물체는 강하 할 때 직선보다는 사이클로이드 곡선위를 움직일 때 더 빠르게 움직인다. 가장 빠른 선을 안다는 것은 결국 미적분의 개념을 안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을 낸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가 처음으로 미적분을 만들었을까?
미적분 논쟁을 하기 전에 먼저 라이프니츠와 뉴턴에 대해 알아보도록하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1646년 7월 1일생으로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다.
라이프니츠는 수학 뿐만 아니라 공학 철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계적 계산기 분야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한 사람 중 한 명으로
파스칼의 계산기에 자동 곱셈과 나눗셈 기능을 추가했고,
1685년에 핀 톱니바퀴 계산기를 최초로 묘사했으며,[5]
최초로 대량생산 된 기계적 계산기인 라이프니츠 휠을 발명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모든 디지털 컴퓨터의 기반이 되는
이진법 수 체계를 다듬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와 함께
17세기 최고의 3대 합리주의론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현대 분석철학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아이작 뉴턴
1643년 1월 4일생으로 잉글랜드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다.
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1687년 발간된 프린키피아에서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아인슈타인이 태어나기 전 까지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수학적 업적으로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 메소드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에 해를 빠르게 근사시키는
방법을 발명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참고로 뉴턴은 영국 왕립학회 회장출신이다.
쨋든 여기서 왜 이 둘이 미적분을 가지고 싸우게 되었을까?
미적분이 도대체 뭐길래 그랬을까?
행성의 운동, 비행 및 물체의 낙하, 기체의 팽창이나 유체의 흐름, 날씨예측 부터 주식시장 분석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하는 사물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미적분이다.
수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히는 미적분은
변화에 대해 연구하며 과학, 공학,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뉴턴은 '유율법'(流率法 : method of fluxion)이라고 불리는 미적분법을 만드는데
그는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나타내는 수학적 방법으로 미적분을 만들었다.
그러나 뉴턴은 자신의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측근들만이 그 연구 내용을 알고 있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유럽의 최고 과학자였던 호이겐스로부터 직접 수학을 배웠고 이후 미적분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면서 1675년 사물의 핵심을 표현하기 위해 오늘날의 수학책에 등장하는 'dy/dx'혹은 '∫ '과 같은 기호를 고안했다.
발명은 한 사람 또는 집단에 돌아가는 영광이다.
한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는데
멀리 떨어져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던 두 천재가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세계적 발명을 했다.
그러던 1712년 뉴턴의 동료들이 출간한 <서신왕래>가 출간되면서
우선권 논쟁이 시작된다.
뉴턴은 1666년에 미적분을 발명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간 연구한 내용이 포함된 눈문은 발표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1684년 미적분에 관한 첫번째 논문을 발표했다.
3년 후 1687년 뉴턴이 출간한 <프린키피아>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포함,
미적분을 사용하여 결론을 내린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1673년 런던 왕립학회를 방문했을 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미 출간 논문들 중 일부를 본 것을 빌미로
당대의 영국 수학자들은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생각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또한 1676년 뉴턴은 보다 상세한 정보를 요구하는 라이프니츠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이론을 모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라이프니츠의 이론이 칭송 받자 표절 시비를 제기했다.
이에 빡이 친 라이프니츠는 반박하는 책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미적분학의 발명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벌어진
영국 수학자들과 독일 수학자들 사이의 언쟁은 점점 격렬해졌다.
싸움의 양상은 '뉴턴파 대 라이프니츠파' 를 넘어
'영국 대 대륙' 으로 확대되었다.
유럽의 학계는 두 파로 나눠져 한 세기 이상 격렬한 논쟁을 되풀이했고
한동안 교류를 중단하기도 한다.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 우선권 논쟁은 결국 1820년에 이르러
두 사람의 독립적인 발견이 인정되면서
두 사람은 미적분학의 동시 발견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여기 까지만 본다면 뉴턴이 먼저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호를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영국의 뉴턴이 각자 미적분학 체계를 구축해 나갈 때,
각자의 기본 틀은 같았지만 각자가 사용하는 기호는 달랐다.
예를 들어 'y를 x에 대하여 미분하는' 것을,
라이프니츠는 ' dy/dx '로 쓰고, 뉴턴은 ' y ´ ' 로 썼다.
라이프니츠는 lim(Δx→0) (Δy/Δx) = lim(Δx→0) Δy / lim(x→0) Δx 에서
' lim(Δx→0) ' 에 해당하는 부분을 간소화시켜 ' d ' 라는 한 문자로 표기하였고,
뉴턴은 그것을 더욱 간소화시켜
' y ' 라는 문자 오른쪽 위에 콤마 하나를 찍은 것에 그쳤다.
그러나 이는 합성함수의 미분, 역함수의 미분 등 여러 가지 관계를 나타낼 때에 뉴턴식 표기의 큰 약점이 되었다.
뉴턴식 표기의 가장 큰 약점은, f ´(x)와 같은 도함수를 표기하는 데에는 유리하나,
매개변수함수나 다변수함수에서 연쇄율을 적용하는 방법을 기호로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문자가 x로 미분되었는지, y로 미분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식 표기는 이런 예에서 놀라울 정도의 잘 표현한다.
무려, '약분'까지 가능해지면서 말이다.
약분이 가능한 이유는, ' dx ' 혹은 ' dy ' 라는 문자 자체가 '미소증분'의 의미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이는 '어느 상태'를 형식적으로 적어둔 것이 아니라 '양'을 나타냈기 때문에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미적분의 표기법 차이는 두 사람이 미적분에 달려들었던 동기의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뉴턴은 시간과 더불어 운동하는 점이나 선이 만들어 내는 변화량을 수학적으로 나타내려고 미적분을 만들어 냈다.
한편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에는 시간이나 변화량 등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곡선의 기하학적 특징을 추구해감으로써 접선이나 넓이의 문제를 풀기 위한 방법으로 미적분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 연구를 하다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수학적 정의의 완벽함은 뉴턴에게, 미분학 기호의 편리성과 이론 전개는 라이프니츠에게 있다고 말한다.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살았던 시대에 영국학술원은 라이프니츠가 도덕적으로 비열할 뿐 아니라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그 후 라이프니츠는 죽을 때까지 고독한 말년을 보내게된다. 하지만 비교적 어려운 미적분 방법에 의해 영국의수학 발전은 독일에 비해 한동안 뒤쳐지게 되고 현대에 와서 우리가 쓰는 모든 기호는 라이프니츠의 기호를 쓰고 있다. 당신은 누가 이 논쟁에서 이겼다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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